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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 이야기

심리학

by 박민돌 2023. 1. 1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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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 문화어: 찰스 다윈, FRS, 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또 다윈은 우생학 이론을 창시하였던 골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리가 교수는 '찰스 로버트 다윈은 사람과에 속한 두 종이 서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 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흑인 해방노예 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의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다.

이때 배운 박제제작법은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학년 때에는 플리니 협회(급진적인 유물론에 매료된 박물학 학생들의 클럽,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와 연관)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 등에 종사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로버트 에드몬드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 날, 그랜트는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놀랐지만, 그 무렵 할아버지의 책을 읽어 유사한 개념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고 있었다.

대학교의 박물학 수업은 지질학의 수성론(Neptunism)과 화성론(Pluton ism) 논쟁 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 식물의 분류를 배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 수집을 자랑한 에든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1831년에서 최고 성적으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했다. 과학 역사는 이 두 대학교 시절을 다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고 있지만, 본인은 훗날 회고록에서 "학문으로서 대학교도 (에딘버러 대학교도)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 뒤 찰스 로버트 다윈는 세계 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버지 로버트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그러나 에딘버러 대학 재학시절의 은사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의 간곡한 설득으로 아버지 로버트는 아들의 세계 일주를 허용하였고, 이는 훗날 그의 생애는 물론 생물학계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는 비글호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찰스 로버트 다윈는 관찰한 것, 이론적 고찰을 꼼꼼히 기록했고, 가끔 견본들을 편지와 함께 가족들을 위해 잡지 사본을 케임브리지로 보냈다.

찰스 로버트 다윈는 지질학, 딱정벌레 수집, 해양 무척추동물에 전문성을 가지게 되었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초보였고, 전문가들의 평가를 위해 열심히 본보기를 수집했다. 항해하는 동안 겪게 되는 반복적인 뱃멀미로 오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동물학 노트는 조용한 휴식 기간에 수집한 플랑크톤으로부터 해양 무척추동물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갈라파고스 군도의 각 섬, 그리고 섬의 해변과 내지에 사는 거북과 새들이 동일한 과에 속하는 종임에도 환경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 그를 깊이 매료시켰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흔히 진화론의 이론을 정리한 생물학자로만 알려져서 당시 일부 보수 언론들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대는 풍자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하지만, 찰스 로버트 다윈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백인들의 흑인 노예 제도에 격분하여, 노예 제도를 반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찰스 로버트 다윈는 남아메리카 여행 당시 비글호 선장과 노예제도 문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선장이 노예들이 행복하냐는 질문에 대해 모두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찰스 로버트 다윈은 이에 대해서 만약 주인이 없는 곳에서도 그런 말을 하겠느냐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백인 주인들이 노예들을 고문하는 노예제도를 반대했다.
한편 찰스 로버트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와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한' 문제의 발언이 나오기 직전인 1856년 독일의 라인란트 주 뒤셀도르프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이 발견되면서 논쟁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유언
찰스 로버트 다윈이 죽기 전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았으며, 찰스 로버트 다윈이 친구에게 히브리 성서의 창조설을 진리로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회복했다는 소문이 존재하나 이는 거짓이다.

찰스 로버트 다윈은 "나는 죽음 앞에서 일말의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기고 1882년 4월 19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 성공회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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